설교·마태복음 28:18-20·2026년 10월 6일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 마태복음 28:18-20

성령강림 후 · 마태복음 28:18-20 · 이번 주일은 성령강림 후입니다. 마태복음 28:18-20 본문으로 강단에 서시는 분들을 위해, 본문 선택부터 완성까지 SermonSage에서 작성한 설교 한 편을 그대로 싣습니다. 강단에서 쓰시기 전, 한 사람의 회중으로 먼저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 이 설교의 근거 — 문단 23개 중 5개에 근거가 표시되어 있습니다 · 주석 인용 4건 · 성경 구절 2회 · 원어 단어 4개

마태복음 28:18-20

이번 주일은 성령강림 후입니다. 마태복음 28:18-20 본문으로 강단에 서시는 분들을 위해, 본문 선택부터 완성까지 SermonSage에서 작성한 설교 한 편을 그대로 싣습니다. 강단에서 쓰시기 전, 한 사람의 회중으로 먼저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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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제목: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주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제자 된 자들은 세상 끝날까지 그분의 권세와 임재를 의지하여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서론

우리는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서 흔히 "누가 나를 도울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곤 합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우리의 작은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거대한 파도와 마주할 때 우리는 깊은 무력감을 느낍니다. 1세기 갈릴리라는 작은 변방, 예루살렘 성전의 권위와 로마 제국의 철권통치 아래에서 제자들은 바로 그런 깊은 좌절과 공포를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따르던 스승은 십자가 위에서 무력하게 처형당하셨고, 그들은 문을 닫아걸고 숨죽여 지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패배의 자리에서, 세상이 끝났다고 여겨지던 바로 그 지점에서 역사는 새로운 반전을 맞이합니다. 오늘 본문인 마태복음 28장 18절에서 20절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언을 담고 있습니다. 무덤을 깨뜨리고 나오신 부활의 주님께서 제자들을 갈릴리의 한 산으로 부르셨습니다. 마태복음의 전체 구조를 살펴보면, 이 부활의 장면은 단순히 한 사건의 결말이 아니라 복음서 전체를 지탱하는 기둥입니다. 예수님은 산 위에서 가르치셨고, 산 위에서 변모하셨으며, 이제 다시 산 위에서 세상 전체를 향한 명령을 내리십니다. 이 명령은 단순히 도덕적인 훈계가 아닙니다. 죽음을 이기고 승리하신 왕이 자신의 백성에게 내리는 통치 선언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우리 삶의 현장에 짓눌린 불안을 걷어내고, 부활하신 주님의 다스림을 다시금 확인하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본문이 기록된 당시 유대 사회에서 갈릴리는 소외와 멸시의 땅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은 갈릴리에서 나오는 선지자가 없다고 조롱했고, 그곳 출신인 제자들은 세상의 중심부에서 밀려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가장 낮은 그 땅에서, 가장 연약해진 제자들을 만나셨습니다. 세상은 권력과 부와 명예가 중심이라고 말하지만, 부활하신 주님은 가장 보잘것없는 제자들의 회복으로부터 온 세상을 구원하는 대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붙들어야 할 희망의 기초입니다. 우리의 실패와 무력함은 주님의 권능이 드러나는 가장 완벽한 무대가 될 수 있습니다.

본론

1대지. 권세(ἐξουσία, 엑수시아, 권한)를 가지신 주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다가오셔서 말씀하십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여기서 '권세'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단순히 힘이나 물리적 압박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는 통치할 수 있는 합법적인 권한, 즉 왕권과 주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거쳐 부활하심으로,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온 우주를 다스릴 유일한 권한을 위임받으셨음을 선언하십니다. 이 권세는 하늘의 영적인 영역뿐만 아니라, 우리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이 땅의 물리적인 영역까지 포함하는 '모든' 영역에 미칩니다. 즉, 예수님은 이제 교회의 머리일 뿐만 아니라 온 우주의 왕이십니다. 이 선언이 제자들에게 얼마나 놀라운 충격이었을지 상상해 보십시오. 그들은 며칠 전까지만 해도 로마의 빌라도 총독과 유대 산헤드린 공회의 눈치를 보며 벌벌 떨던 자들이었습니다. 세상의 권력 앞에서 한없이 작아 보였던 그들에게, 예수님은 당신이 가진 하늘의 권세가 그들 뒤에 있음을 확인시켜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날 직장과 가정, 사회 속에서 때로는 세상의 불공정함과 거대한 현실의 장벽 앞에서 위축될 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진리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의 주인 되신 예수님께서 이미 온 우주의 통치권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분의 권세는 일시적이지 않으며, 어떤 세력도 빼앗을 수 없는 절대적인 것입니다. 많은 성도가 기도를 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삶을 다스리는 분이 누구인지 잊곤 합니다. 직장 내에서의 갈등이나 경제적인 어려움이 닥쳐오면, 마치 이 세상의 통치자가 돈이나 사람인 것처럼 그들의 눈치를 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권세는 오직 예수님께 있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주인으로 모시고 있다면, 우리는 더 이상 세상의 권력에 종속된 자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권세 아래 있는 자로서 세상을 향해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 권세는 단지 우리를 보호하는 방패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세상을 향해 나아가 복음을 전할 수 있게 하는 강력한 동력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 권세가 우리와 함께하는 주님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복음을 전하거나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을 주저합니다. "나는 능력이 없는데 어떻게 세상을 바꿀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능력을 구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그분의 권세를 선포하셨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이유는 우리에게 대단한 설득력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우리를 보내시는 분이 온 우주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갈릴리 산에서 만난 부활의 주님은, 그들이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차원의 통치를 선포하셨습니다. 이 통치는 압제와 폭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희생과 사랑을 통해 증명된 진정한 주권입니다. 오늘 우리도 우리 삶의 주인 되신 예수님의 권세를 인정할 때, 비로소 세상의 두려움에서 자유로워지는 은혜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1]

2대지.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가르치고 세례를 주라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권세를 선포하신 직후, 제자들에게 거대한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 여기서 '가서'라는 말은 단순히 이동하는 것을 넘어, 주님의 권세를 가진 자로서 삶의 현장으로 나아가는 전방위적인 움직임을 의미합니다. '제자로 삼으라'는 명령은 복음서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입니다. 제자란 단순히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가 아니라, 그분의 가르침을 배우고 그분의 삶을 본받아 실천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단순히 개종자를 만들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의 인격과 사역을 닮은 사람을 길러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1세기 유대 사회의 폐쇄적인 선민사상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혁명적인 명령이었습니다. 제자를 삼는 구체적인 방법으로 예수님은 '세례를 주라'고 하셨습니다. 세례는 단순히 의식을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한 사람이 옛 삶을 청산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거룩한 표징입니다. 더 나아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는 말씀은,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 속으로 초대받았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말씀은, 제자도의 핵심이 지식의 전달이 아니라 '지키는 것'에 있음을 강조합니다. 성경 지식을 많이 아는 것이 제자의 조건이 아닙니다. 그 말씀을 삶의 자리에서 어떻게 순종하며 살아낼 것인지가 제자도의 진정한 시험대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와 성도들이 이 명령을 오해하여, 복음을 전하는 것을 단순히 교회 숫자를 늘리는 일로 생각하곤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숫자의 팽창이 아니라 삶의 변화입니다. 우리의 가정에서, 직장에서,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주님의 말씀이 어떻게 실천되고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즉, 우리 삶의 아주 사소한 부분까지도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게 하는 것이 제자도의 완성입니다. 우리가 퇴근길 지하철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향한 태도, 혹은 자녀를 학원에 보내며 느끼는 입시 경쟁 속에서의 정직함, 이런 구체적인 삶의 현장이 바로 우리가 제자로서 사명을 감당해야 할 선교지입니다. 물론 우리는 자신의 삶조차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연약함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완벽함을 먼저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제자로 부르시고, 그 과정 속에서 우리를 빚어가십니다.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명령은 우리 자신이 먼저 그 말씀을 붙들고 몸부림치며 순종하는 과정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먼저 주님의 제자가 되지 않고는 누구도 제자로 삼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선교는 외부로 나아가는 행위인 동시에, 우리 내면의 거룩한 순종을 회복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성공과 효율을 요구하지만, 주님은 우리에게 정직한 순종과 사랑의 관계를 요구하십니다. 그 길을 걷는 자들이 바로 주님의 참된 제자입니다. [2] 이러한 제자도의 길은 결코 우리 자신의 의지나 성과로 이루어지는 업적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해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명령하신 것은, 그들이 먼저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하며 그분의 생명력을 공급받는 상태에 머물러야 함을 전제합니다. 여기서 '지키다(τηρέω, 테레오, 주의 깊게 보존하고 준수하다)'는 단순한 규율 준수가 아니라, 마치 귀한 보물을 잃어버리지 않으려 품는 것과 같은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의 명령을 우리 존재의 중심에 새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정의 불화 속에서 인내를 선택하고, 치열한 노후 불안과 경제적 위기 앞에서도 신뢰를 잃지 않는 이유는 우리 안에 거하시는 주님의 말씀이 우리를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자를 삼는다는 것은 결국 우리가 주님께 붙어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며, 그 풍성한 생명이 이웃에게 흘러가게 하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3대지.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의 임재(πνεῦμα, 프뉴마, 영)를 의지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놀라운 약속을 남기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여기서 '세상 끝날'이라는 표현은 헬라어로 '완성(συντέλεια, 쉰텔레이아, 완성)'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는 역사의 흐름이 맹목적으로 흘러가다가 허무하게 멈추는 지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계획이 완벽하게 성취되는 종말론적인 완성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가 아무리 혼란스럽고 악한 권세가 득세하는 것처럼 보여도, 그 모든 시간의 끝은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놓여 있습니다. 주님은 그 끝날까지, 아니 그 완성의 그날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은 단순한 감성적인 위로가 아닙니다. 19절에서 명령하신 제자 삼는 사명은 우리 인간의 힘만으로는 결코 완수할 수 없는 거대한 과업입니다. 민족을 가르치고 세례를 주며 그들을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빚어가는 일은 때로 우리의 인내를 시험하고, 때로는 불가능해 보이는 벽에 부딪히게 합니다. 그럴 때마다 주님은 우리가 혼자가 아님을 상기시키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약속은 구약 시대 성막에 임하셨던 하나님의 영광, 곧 '쉐키나'의 임재가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공동체 가운데 영원히 거하실 것임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고독이라는 병을 앓습니다. 1인 가구가 급증하고 사람 사이의 거리는 갈수록 멀어지는 오늘날, 많은 이들이 마음의 병을 안고 살아갑니다. 밤늦게까지 야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혹은 명절에도 가족과 함께하지 못한 채 홀로 식탁을 마주하는 성도들의 고독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약속은 그 고독의 한복판에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는 선언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돕는 자로, 우리의 길을 인도하는 분으로, 우리와 함께 고통을 나누는 동반자로 그 자리에 계십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다가 사람들에게 거절당하고 조롱받을 때, 그 아픔을 가장 먼저 느끼시는 분 역시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이십니다. [3] 주님의 임재는 우리가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하는 유일한 근거입니다. 주님은 단순히 우리 곁에 머물러 계시는 관찰자가 아니십니다. 그분은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성령을 통해 우리를 이끄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깨닫게 하시고, 세상이 알지 못하는 평안으로 우리의 마음을 붙드십니다. 복음 전파의 사명은 우리의 언변이나 지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거하시는 주님의 임재를 인정하고 그분의 이끄심에 자신을 내어드릴 때 비로소 능력을 발휘합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신뢰할 때, 비로소 제자로서의 삶은 무거운 짐이 아니라 주님과 동행하는 영광스러운 기쁨으로 변합니다. 교회의 역사를 살펴보면, 가장 박해받고 고난받던 시기에 오히려 복음은 더욱 강력하게 확장되었습니다. 로마의 카타콤에서, 혹은 이름 없는 순교자들의 피 위에서 교회는 더 깊이 뿌리를 내렸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그 고난을 견딜 수 있었겠습니까? 자신들을 부르신 주님께서 '세상 끝날까지' 함께하시겠다는 약속을 문자 그대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처한 삶의 자리에서, 때로는 경제적인 위기로 인해 생존을 걱정해야 하고, 때로는 자녀들의 앞날을 두고 밤잠을 설치며 기도해야 하는 그 모든 순간이 바로 주님께서 함께하시는 현장입니다. 그 현장에서 우리가 신실하게 제자의 길을 걸어갈 때, 주님의 통치는 우리를 통해 세상으로 흘러갑니다. [4]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지상명령을 마음에 새겼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께서 우리를 제자로 부르셨고, 그분의 권세와 임재를 의지하여 세상 끝날까지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이것은 결코 우리의 실력으로 감당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의지하여 이번 주에 구체적으로 실천해야 할 결단이 있습니다. 우리가 속한 구역과 속회 모임에서, 함께 모인 지체들과 서로의 삶을 나눌 때, 단순히 일상의 이야기만 나누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이 이번 한 주간 나의 삶에서 어떻게 일하셨는지를 간증하십시오. 나의 연약함 속에 임하셨던 주님의 은혜를 입 밖으로 낼 때, 그 모임은 단순한 사교 모임을 넘어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작은 천국이 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 주변의 이웃들을 돌아보십시오. 우리 곁에는 여전히 복음의 빛이 필요한 이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만나는 이웃의 고통과 갈등 속에 주님의 통치가 임하기를 기도하며, 친절과 정직이라는 제자의 언어로 그들에게 다가가십시오. 우리가 하는 작은 섬김과 말 한마디가 누군가에게는 주님의 권세를 보여주는 통로가 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거창한 업적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당신이 우리와 함께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고, 그 믿음대로 삶의 자리에서 신실하게 살아내는 '제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마지막으로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이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고, 부활하셔서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와 동행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십자가는 우리의 모든 죄와 실패를 덮으셨고, 그분의 부활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과 소망을 보증하셨습니다. 우리가 때로 넘어지고 실수할지라도, 주님은 우리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를 통해 이 세상에 당신의 나라를 이루어가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이 위대한 사명은, 그분이 먼저 십자가를 지심으로 완성하신 구원의 은혜 위에서 세워졌습니다. 우리가 제자로 부름받은 것은 우리의 가치가 높아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신 주님의 사랑이 무한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담대히 나아갑니다. 우리 힘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고 우리와 영원히 함께하시는 부활의 주님을 의지하여, 오늘도 그분의 통치 아래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와 세상 끝날까지 함께하시겠다는 약속을 붙듭니다.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이 거룩한 제자의 길을, 주님의 권세와 임재를 의지하여 기쁨으로 걷게 하옵소서. 우리 삶의 모든 현장에서 주님의 다스림을 증거하며,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온전히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십자가의 은혜와 부활의 능력으로 우리를 붙드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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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본 설교가 근거로 삼은 주석입니다. 본문의 [번호]가 아래 항목을 가리킵니다.

  • [1] 매튜 헨리 주석 / Matthew Henry's Commentary — 마태복음 2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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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erses 16-20 This evangelist passes over several other appearances of Christ, recorded by Luke and John, and hastens to this, which was of all other the most solemn, as being promised and appointed again and again before his death, and after his resurrection. Observe, I. How the disciples attended his appearance, according to the appointment (v. 16); They went into Galilee, a long journey to go for one sight of Christ, but it was worth while. They had seen him several times at Jerusalem, and yet they went into Galilee, to see him there. 1. Because he appointed them to do so. Though it seemed a needless thing to go into Galilee, to see him whom they might see at Jerusalem, especially when they must so soon come back again to Jerusalem, before his ascension, yet they had learned to obey Christ’s commands and not object against them. Note, Those who would maintain communion with Christ, must attend him there where he has appointed. Those who have met him in one ordinance, must attend him in another; those who have seen him at Jerusalem, must go to Galilee. 2. Because that was to be a public and general meeting. They had seen him themselves, and conversed with him in private, but that
    Matthew Henry's Commentary · 매튜 헨리 †1714 · 마태복음 28:16–20
  • [2] 칼빈 주석 / Calvin's Commentary — 마태복음 2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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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o out, therefore, and teach all nations. Though Mark, after having related that Christ appeared to the eleven disciples, immediately subjoins the command to preach the gospel, he does not speak of these as an unbroken series of events, for we learn from the enumeration of them which is given by Matthew, that the latter event did not take place before they had gone into Galilee. The meaning amounts to this, that by proclaiming the gospel everywhere, they should bring all nations to the obedience of the faith, and next, that they should seal and ratify their doctrine by the sign of the gospel. In Matthew, they are first taught simply to teach; but Mark expresses the kind of doctrine, that they should preach the gospel; and shortly afterwards Matthew himself adds this limitation, to teach them to observe all things whatsoever the Lord hath commanded. Let us learn from this passage, that the apostleship is not an empty title, but a laborious office; and that, consequently, nothing is more absurd or intolerable than that this honor should be claimed by hypocrites, who live like kings at their ease, and disdainfully throw away from themselves the office of teaching. The Pope of Rome and
    Calvin's Commentary · 장 칼뱅 †1564 · 마태복음 28:19
  • [3] 길 주석 / Gill's Exposition — 마태복음 28:20
    원문 보기 · 퍼블릭 도메인
    Teaching them to observe all things,.... All ordinances, not only baptism, but the Lord's supper; all positive institutions, and moral duties; all obligations, both to God and men; all relative duties that respect the world, or one another, those that are without, and those that are within; and these are to be taught them, and therefore to be insisted on in the ministry of the word; and not merely in order that they may know them, and have the theory of them, but that the may put them into practice: whatsoever I have commanded you; every thing that Christ has commanded, be it what it will, and nothing else; for Christ's ministers are not to teach for doctrines the commandments of men; or enjoin that on the churches, which is of their own, or other men's devising, and was never ordered by Christ; and for their encouragement he adds, and lo! I am with you always, even unto the end of the world: meaning, not merely to the end of their lives, which would be the end of the world to them; nor to the end of the Jewish world, or state, which was not a great way off, though this is sometimes the sense of this phrase; but to the end of the world to come, the Gospel church state, which now to
    Gill's Exposition · 존 길 †1771 · 마태복음 28:20
  • [4] 찰스 스펄전 설교집 / Spurgeon's Metropolitan Tabernacle Pulpit — 마태복음 28:20
  • 태그성령강림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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